초심자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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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해였다. 한국 나이로 서른 살을 맞이했고, 꽤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올해 초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별한 각오나 감흥 없이 맞이했던 것 같다. 작년인 2022년을 인턴을 전전하며 보낸데다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새해가 주는 희망찬 느낌은 관성적인 불안감, 그리고 ‘어떻게든 잘 해봐야지’라는 조급함에 대체되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한 해 동안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많은 일을 겪었다. 마치 누군가 내 인생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것 같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고, 입사하자마자 사수도 없이 여러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얼마 뒤 회사는 피봇을 결정했고, 신입이었던 나는 갑작스레 프로덕트 매니저로 직무를 변경해 팀을 이끌게 되었다. 적지 않은 고생 끝에 새로운 팀에 겨우 익숙해 졌을 때 쯤, 나는 새로 설립한 스타트업에 합류할 것을 제안 받았고 최근 초기 멤버로 합류해 같이 회사를 만들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정신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연초 예상보다 많은 의미가 있었던 올해를 보내며, 처음으로 회고글을 작성해보려고 한다. 올해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추려봤다.

좋아하는 일

나는 짧은 경력에 비해 꽤나 난잡한 커리어를 가진 편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나름 국내에서 명망 있는 로봇 연구실 에 진학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고서야 연구자가 내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고, 꽤나 긴 시간을 방황하며 보낸 것 같다. 이전에 한 가지에 몰입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경험해 봤기 때문인지, 또 다른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다. 변명 같기는 하지만, 어떤 걸 하려고 해도 딱히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전공과는 무관하게 VC, 컨설팅 등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보내던 중 나는 우연히 크립토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부터 어렴풋이 코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스캠이라는 것도),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걸 접하게 된 순간은 작년 중순 쯤이었다. 순수한 호기심에 이것 저것 공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첫 커리어로 크립토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기회 비용에 대한 고려보다는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된다는 점이다. 바꿔말하면 조금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일을 대하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주변에서, 특히 커리어의 초입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정말 맞을까’ 또는 ‘더 좋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가진 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나 또한 답도 없는 질문을 고민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었다. 지금은 이전과 비교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빈도가 크게 줄어 들었다. 장기적으로 이 산업이 분명이 가치가 있는 일이 될거라는 (예측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있고, 반드시 성공하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믿거름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로 ‘Infinite Game ’이 있다. 어떤 게임은 이기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어떤 게임은 그 행위 자체에 의미를 가진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트렌드는 항상 바뀐다. 잠깐의 등락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좋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호기심은 대단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도 실행할 명분을 제공한다. 이전이나 지금 회사에 일하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도해보고 싶은 아이디어들이 많다. 주변 동료에게 ‘이런 거 해보면 어떨 것 같아요?’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의 눈길을 보낸다. 일반적인 답변은 의미가/결론이 뭐에요?, 왜 하는 건데요? 등등의 질문이 뒤따른다. 사실 나도 원래 같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순전히 호기심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인턴하다가 뜬금없이 해커톤에 참가 해보고, SQL을 배워서 분석 대시보드 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관심 있는 주제들에 관해 리서치 글을 발간 하기도 했었다. 호기심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안 해본 일들을 하게 된다. 그 자체가 대단한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보면 거기서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 개인과 사업에 있어 운이 차지하는 영향은 지대하다. 확률은 변하지 않지만, 과녁의 크기를 키울 수는 있다.

가끔은 큰 기업이나 조직에서 일해보지 않고 곧 바로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을 상당히 아쉽게 느낄 때도 많다. 반대로 이 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산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높은 책임을 요구하는 업무를 경험해 볼 수 있었고, 스스로의 Comfort Zone을 넓히는 데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뛰어난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혜택 중 하나이다. 주변의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커리어나 삶의 단조성(Monotonicity) 을 버리지 못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다소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한 번의 하락도 없이 상승이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것 같다. 심지어 상승의 폭이 매우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졸업하고 만난 동기들 중 자신이 하는 일을 재밌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으며, 그나마 눈이 반짝이던 이들은 대부분 창업을 선택한 친구들이었다.

한창 커리어 고민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턴으로 근무했던 VC의 파트너 분께서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셨다; “예측은 할 수 있겠지만 정답은 알 수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걸 정답으로 만드는 것은 너의 몫이다.” 유망한 분야나 좋은 기업에서 시작한다고 한들 여전히 그저 그런 사람에 그칠 수도 있고, 반면 남들이 기피하는 선택을 하고도 특별한 성과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커리어나 사업에서 성과에 따른 보상은 언제나 비선형적 이다. 뛰어난 그룹의 평균이 되는 것 보다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특별한 성과를 내는 것이 더 높은 기대값을 얻을 수 있다. 다소 뻔한 얘기지만, 결국은 어딜가나 자기 하기 나름이다.

고민 20, 실행 80

나는 스스로를 Heavy Thinker이자 Slow Mover로 평가한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바로 돌입하기 보다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갖는 편이다. 회의에 참석할 때도, 누군가 결론 짓고 넘어가려고 할 때 잠깐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고 짚어 주는 종류의 사람이다. 스스로는 이런 성향을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 한 해를 거치면서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빠른 실행은 분명 축적된다. 아직 PMF를 찾기 이전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어떤 제품을 만들 것인지를 결정할 만큼 충분한 수준의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유일한 방법은 가장 합리적인 가설을 정하고, 그걸 빠르게 실행하는 것이다. 실행의 결과는 새로운 정보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또 실행으로 이어진다. 기업 뿐 아니라, 개인의 삶이나 커리어에 있어서도 상통한다.

Sam Altman은 Fast/Slow Mover의 성향을 가장 바뀌기 어려운 기질 중 하나로 꼽았다. 참고로 빠르게 바뀌는 기질로는 강인함 또는 야망을 꼽았다. 나는 타고난 Slow Mover 중 한 명으로써, 기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몇 가지 고안했다. 그 중 하나는 마감 기한을 약간 무리하게 잡는 것이다. 3일 걸릴 업무라면 2일 뒤에 리뷰 미팅을 잡거나, 2일 걸릴 업무는 내일을 마감 기한으로 설정한다. 단순하지만, 꽤나 효과적이다. 두 번째는 메시지 전송 버튼 누르기다. 빠른 실행에 타고난 분들을 보면서 느낀 공통점 중 하나는 질문하거나 연락을 취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하기 이전 또는 이후에 액션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메시지를 보내거나 미팅을 잡고 나면, 할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반면 빨리 움직이다 보면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한들, 방향이 틀렸다면 의미가 없다. 시간은 부족하고 할 일 목록은 쌓여 있다보니 고민하거나 결과물을 가다듬을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밖에 못 했나’ 싶었던 것들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나면 ‘일단 빨리 하고 치우자’로 바뀌는 케이스를 상당히 자주 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행과 고민의 균형을 맞추는 일일 것이다. 고민을 2로 적게 책정한 이유는 대체로 1) 고민을 많이 한다고 답이 좋은 경우는 드물고, 2) 실행하면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2)에서 실행할 때 하는 고민이 훨씬 효율이 좋다고 많이 느꼈던 것 같다. 퀄리티 또한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완벽을 기하는 것보다, 빠른 피드백을 여러 번 받았을 때의 효과가 훨씬 좋다.(물론 상황에 따라 속도 < 퀄리티일 때도 있다)

할 일의 목록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전부 완료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는 퇴사자 체크 리스트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인터뷰이가 PM의 덕목 중 하나로 ‘물 밑에서 숨쉬기 ’를 꼽았다. 쌓여있는 업무를 모두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밀려 들어오는 업무 안에서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들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PM 뿐 아니라 어떤 직업인들 그렇지 않겠나마는, 특히나 새로 이직한 곳처럼 이제 막 설립된 초기 회사라면 더 심할 수 밖에 없다. 제한된 시간 안에 좋은 가설을 설정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훈련과 지능 모두를 요구하는 일이다. 아직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영역이기도 하다.

신뢰를 얻는 방법

이전 회사에서 입사 6개월 정도를 맞이했을 때 조직의 전반적인 개편과 사업 방향의 전환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는 내가 그 동안 이것 저것 시도해보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주셨고, 프로덕트 매니저 직을 제안해주셨다. 세상에는 해보기 전에는 알기 힘든 것들이 많다. 매니저가 되는 것 또한 팀원으로 일한 경험만으로 완전히 터득하기 어려운 업무 중 하나이다. 매니저가 되는 것은 분명 팀원일 때와는 전혀 다른 스킬 셋을 요구한다. 형성 초기의 팀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나의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은 남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매니저는 내부적으로는 팀원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합치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PM 업무를 맡자마자 모든 팀원들을 한 명씩 만나 커피챗을 진행했다.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함께 일해본 적 없는 인원들이었으며, 나는 팀원들 중 가장 경력이 짧았다. 당연하게도 처음 만난 이들의 눈에는 의심과 경계의 기색이 역력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도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미숙해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이 수시로 침습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첫 한 달 간은 식사량도 줄어든데다가 생전 처음 수면 내시경까지 받을 정도였다.

팀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내가 택한 전략은 극단적인 투명함과 솔직함이었다. 제품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 과정과 팀 대내외 상황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공유했다. 개발자 또는 디자이너가 꼭 알 필요는 없는 내용이라고 할 지라도, 왜 이런 식으로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비슷한 제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에는 무엇이 있고 그 중 어떤 것이 최선인지, 스프린트 미팅은 왜/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등을 노션으로 작성해 팀 회의에서 종종 발표를 했었다. 심지어 제품이 가진 한계와 해야 하지만 안 하는 것들과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했었다. 이외에도 현재 경영진 입장에서 고려하는 사항이나 영업 팀의 요구사항 등까지도 전달하면서 모두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합의를 맞추는 것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이 나를 포함해 모두에게 단지 해야 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일임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틈틈이 PM의 스킬을 갖추기 위한 공부도 빼먹지 않았다. 다른 PM들은 어떻게 일하는 지 가능한 많이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모든 회사와 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 지 아는 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크게 도서나 동영상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과 주변 동료를 참고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도서 중에서는 PM의 교과서로 불리는 인스파이어드와 국내 도서인 프로덕트 오너 등을 참고했다. 특히나 인스파이어드는 예전에 재미로 읽었을 때는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 해서 중간에 포기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는 모든 챕터가 내가 일하면서 겪었던 상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관련된 책들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로지컬 씽킹, 생각에 관한 생각, 논리의 기술 등을 추천한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옆 팀의 매니저 분들의 업무 스타일을 참고하거나,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권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 분들이 작성한 문서를 자세히 뒤져보거나 어떤 식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지를 인터뷰했었다. 다시 처음 PM을 맡은 때로 돌아간다면 회사 내 모든 매니저 분들의 미팅에 참석해 어떤 식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지 습득할 것 같다.

나의 노력이 이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 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팀이 굴러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각자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가 명확해졌기 때문에 점점 더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줄어들었고, 내가 일을 안 해도 업무가 진행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안 하진 않았다). 팀원들과도 좀 더 친해졌고, 솔직한 피드백과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것들도 많지만 올해 스스로가 가장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사람을 통한 성장

스타트업이란 절벽에서 뛰어내린 후에 떨어지기 전에 비행기를 조립하는 것이다. 링크드인의 창업자이자 페이팔 마피아로 잘 알려진 리드 호프먼의 말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트업에 합류할 당시 이 문구를 떠올렸다. 아마 대표에게 이 사업은 성공할 리가 없다 고 말하면서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직원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회사에 합류한 이유는 같이 일하게 될 동료들의 역량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나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고, 내 주변을 좋은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좋은 BM을 가진 회사에 가는 것보다 나에게 중요한 자산이라고 여겼다. 합류한지 두 달여가 지난 지금, 난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더욱 성장하게 만드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나는 자기 조절 능력이 그리 높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더욱 닦달하게 되는 계기로 삼게 되는 것 같다. 겨우 7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회사이지만, 뛰어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에서 1 인분 이상을 수행하기 위해서 내가 원래 가진 역량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 특히나 각자만의 확실한 강점을 가진 분들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를 뾰족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업무의 Capa가 정말 높은 분들이 있고, 네트워킹을 정말 잘하는 분, 마케팅이나 브랜딩 감각이 정말 좋으신 분들도 있다. 아직 나는 스스로가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할 지 찾아 나가는 단계에 있다.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나이의 동료 또한 좋은 자극으로 작용하지만, 나보다 한 두 단계 위의 경험과 역량을 가진 분들과의 대화는 내가 보지 못 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전 회사에서 퇴사한 이후 같이 일했던 팀장님이나 CBDO님을 만나 뵌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전 회사의 시드 단계에 합류해 시리즈 C 수준의 회사로 커지는 과정을 모두 함께한 분들이셨다. 그러다보니 나와 현재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고민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까지 어느 정도 가늠하고 계셨다. 그 분들이 주신 조언은 우리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고, 불필요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다.

또한 우리 회사의 투자사 중 하나인 베이스 인베스트먼트의 이태양 그로스 파트너님을 만나뵌 적이 있었다. 간략하게 6개월 간 회사를 운영하며 느낀 것들과 현 상황,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관해 설명드렸었다. 잠시 듣더니 파트너님께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져 주셨고, 난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 했다. 명확하게 가설을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부분에 있어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는 고객에 대한 집착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태양 님이 가장 강조하신 부분 중 하나이다. 고객을 명확히 정의하고 이들과 실제로 대화해 보는 것. 고객에 집착하라는 메시지는 창업자 또는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나 강연에 항상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액션으로 옮기는 과정은 그리 명쾌하지 않은 것 같다. 고객 군을 특성에 따라 분류해보기도 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데이터를 들여다 보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뾰족하게 고객을 설정하고 이들에게 확실한 가치를 제공하는 것, 10%, 20%가 아니라 10배 나은 효과를 제공하는 것, 스타트업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인 것 같다.

반대로 초기 회사에 있다보니 아쉬운 점 중 하나가 나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시니어와 함께 일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인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보다 한 두 단계 위에 있으신 분들과의 대화는 스스로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같은 회사 내에 있는 게 아니다보니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다. 주니어 레벨에서 능력 있는 시니어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정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땅히 주변에서 좋은 시니어를 찾기가 어렵다면 만만치 않은 스파링 파트너(?)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전 회사에서 PM으로 일하던 당시, 내게 지적으로 가장 도전적이었던 업무는 역시나 대표님들과의 끝장 토론이었다. 제품의 방향성이나 로드맵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의가 오고 갔다. 일반적으로 회사의 대표님 또는 경영진은 범상적이지 않은 카리스마를 가진 똑똑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깊은 수준의 논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연히 매우 바쁘신 분들이라 시간을 같이 보낼 기회가 많지는 않겠지만, 이런 분들과의 대화할 기회는 최대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크립토 씬에 있으면서 느끼는 장점은 능력 있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특히나 일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카이스트의 블록체인 학회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느낀 것 같다. 모든 학회원 분들과 깊이 이야기 해보지 못 했지만, 대부분의 학회원들의 면접 과정에 참여하면서 얼마나 뛰어나고 열정이 넘치는 분들이 많은 지 느낄 수 있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 스스로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감히 내가 면접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이 산업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과 대화해 볼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 했다. 크립토 산업에 종사하는 분이건 아니건, 똑똑하고 야망이 넘치는 분들과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해보고 싶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내게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불러 일으킨다.

문제는 내가 그리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말을 걸거나 인사를 건네는 타입과 거리가 멀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성의 전형 그 자체다 (스몰 토크? 그게 뭔데). 자존심이 강한 것도 아니고 소심하거나 부끄럼을 타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필수적이지 않은 대화를 꺼낼 생각 자체를 못 하는 성격인 것 같다. 그래서 주변에 네트워킹을 정말 잘 하는 동료를 옆에서 보고 있자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성격 탓에 네트워킹을 위해서는 뭔가 명분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학회 운영은 올해를 끝으로 다른 분들에게 넘겨드릴 예정이다. 내년에는 좀 더 다른 활동을 기획해 새로운 분들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더 나은 2024년을 위해

2023년,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뿌듯함 보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24년을 앞둔 지금, 분명 23년을 맞이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간략하게 내년을 위해 해야할 것들, 23년에 해야 했지만 못 한 것들을 정리해봤다.

  1. 속도와 완결성: 아직도 스스로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민하느라 시작 시점을 딜레이시키거나,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일도 꾸물거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펜딩 또는 WIP 상태로 유지되는 업무의 양이 너무 많다. 업무마다 기한을 명확히 설정할 것. 그리고 하나의 업무를 확실히 완료하고 다음 업무로 넘어갈 것.

  2. 중요한 일을 하기: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2023년에는 여러가지 시도와 탐색을 하는 데 집중했다. 크립토 산업 내에서도 할 수 있는 일과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수 없이 많다. 하나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태스크와 주제들을 탐험했었다. 다음은 좀 더 집중할 차례이다. 2024년에는 조금 더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집중하려고 한다. 좀 더 성공과 실패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일들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3. 독서: 언제나 말만 하지만 잘 안 된다. 특히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더 시간을 내기가 힘든 것 같다. 독서 이외에도 주짓수나 영화 등 나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활동들을 필요로 한다. 일 외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을 잘 채우기 위해서라도 집중해서 제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결혼: 요즘 급하게 결혼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인생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뭐든 어떻겠나. 퇴근하고 집에 가면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무리 힘든 하루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삶에서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이다.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올해가 시작하던 1년 전,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 했었다. 나는 지나칠 만큼 무모했고, 당연히 했어야 할 고민들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순진했다. 모두에게 추천할 만한 삶의 태도는 분명 아니겠지만, 나는 인생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크게 만족하고 있다. 아직 채워야 할 것들이 한참 남았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