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pe of Crypto
The Infinite Game #
Every rejection, every disappointment has led you here to this moment. Don’t let anything distract you from it.
–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블록체인 안에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한 데 모여 있다. 코인 트레이더부터 스캐머, 엔지니어, 연구자, 기업가, Justin Sun, Brian Armstrong, Do Kwon과 Vitalik Buterin까지. 한 데 엮이기 힘든 족속들이 모여 이룬 산업이니 만큼, 각자가 바라보는 블록체인의 모양은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들마저도 전혀 다른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크립토 산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왜 블록체인인가? 왜 블록체인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인가? 사람마다 제 각기의 대답을 듣는 것이 흥미롭게 느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가 저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찾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역으로 질문을 받을 때도 많다. 그 때 그 때 나만의 대답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외부 요인으로 인해 또는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면서 나의 대답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번 글은 내가 생각하는 블록체인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게임은 이기기 위해서 플레이하지만, 어떤 게임은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는 덧 없는 인생에 의미를 채워넣기 위해 각자만의 끝나지 않을 무한한 게임(Infinite Game)을 필요로 한다. 어린 나이에 일찍 깨우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유한한 게임을 무한한 게임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하는 경제적 자유는 분명히 유한한 게임이다. 차라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한한 게임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무한한 게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살면서 수 없이 많은 기회와 마주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기회를 붙잡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주변의 시선과 혹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모든 선택은 오로지 침전물이 가라않은 뒤에야 결과론적인 해석만이 가능하다. 가끔은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성 앞에서 압도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의 본질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는 것은 순간 순간의 번뇌 속에서 판단력을 흔들리지 않기 위한 연습이다.
Exploration, Experiment and Evolution #
To invent you have to experiment, and if you know in advance that it’s going to work, it’s not an experiment
– Invent and Wander, Jeff Bezos
크립토가 가지는 가장 큰 함의는 기존의 사회, 금융 그리고 기술이 놓인 시스템에 새로운 실험과 Trial and Error를 위한 테스트 베드를 마련했다는 점이라고 믿는다. 최근 Paradigm의 Matt Huang은 Casino on Mars 라는 환상적인 글을 남겼다. 현재 크립토 산업과 이를 바라보는 주변의 환경을 가장 잘 묘사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크립토 산업은 마치 화성에 도시를 짓는 일과 같다. 분명 지구의 사람들에게 화성(크립토)은 황량한 폐허, 혹은 도박꾼들이 우글거리는 무법지대에 불과하다. 반면 어떤 이들에게 그 곳은 기회의 땅이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터전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낡은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것보다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낡고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이거나, 거대한 Web2 기업들이 독식하는 시장 구조일 수도, 혹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일 수도 있다. 다만 크립토에 진심인 이들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면 이 곳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칸이라는 점이다. 빈 칸이 주는 가장 큰 설렘은 기존 환경에서는 상상하지 못 한, 어떤 것이든 새롭게 지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사회, 경제와 기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분석적인 해결책을 곧 바로 도출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특성을 가진 시스템이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풀 가치가 없거나, 이미 누군가가 해결했을 것이다). 최적화 이론에 빗대자면 이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마치 눈을 감고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과 유사하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눈을 감고도 산을 오르는 방법은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파른 경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개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 지 특정하기는 까다롭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꽤나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를 하나씩 해소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사방이 내리막인 지점,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만 전체 지형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그 곳이 작은 언덕 위일지, 에베레스트의 정상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 무작위적인 행동을 통해 지엽적인 최적값에 고착되는 것을 방지한다. 때로는 가지 않던 음식을 먹어보고, 사지 않는 옷을 입으며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한다. 오르기 전까지는 어느 정상이 더 높은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새로운 도전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것은 더 빨리, 그리고 높이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음식점에 가기 전에 리뷰를 찾아보는 것, 애자일 방법론을 통해 제품을 개발하는 것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경망을 학습하는 것 모두가 시도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법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습관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관습과 유물들로 점철된 시스템은 더 이상 무작위적인 행동을 통한 개선을 적용하기 까다로워진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된 다른 모든 시스템을 제외하고 최악의 통치 형태”라고 말했다. 비단 사회 체제만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많은 것들, 국가와 경제 그리고 기업의 구조 등은 단지 지금까지 제시된 것 중 최선의 시스템이다. 지금의 그것보다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의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시도에 대한 비용을 줄이는 것, 끊임없는 실험과 개선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블록체인이 마련한 것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기틀이다. 블록체인이 가진 공공재적 특성과 자유로운 시장 참여를 독려하는 요소들; 규제 저항성(Censorship Resistance), 비허가성(Permissionless), 오픈 소스와 컨트리뷰션 등은 새로운 내러티브가 제시되고 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만약 사토시가 Bitcoin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터전 또한 블록체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존에 우리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준과 체계를 만들기 위한 실험장을 마련했다는 점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실험적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날 것이다. 제프 베조스의 말처럼 성공 여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실험이 아니다. 하지만 돌연변이 없이 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On Paradigm Shift #
What important truth do very few people agree with you on?
– Zero to One, Peter Thiel
시대를 바꾸는 흐름은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낳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 성장한 기업의 창업자들 Bill Gates, Steve Jobs 와 Eric Shmidt 모두 1955년생으로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한국을 놓고 보면 네이버의 이해진 GIO, 넥슨의 고 김정주 회장, 카카오 김범수 의장이 한 두살 터울의 86학번 동기인 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특정 연도에 유독 천재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이를 가장 잘 수용할 만한 위치 또는 나이에 있던 사람들이 남들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기회를 포착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로 태어난 덕에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임에도 세상이 크게 변화하는 사례를 몇 차례 목격한 바 있다. 어린 시절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성인이 될 무렵에는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모바일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목도했다. 내가 충분히 똑똑한데다 실행력까지 갖춘 기업가였다면 19살 쯤 다가올 기회를 포착하고 창업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는 하루 종일 PC 방에서 친구들과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 하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큰 흐름의 변화를 목격한 세대로서, 특별한 기회는 특별한 변화와 함께 찾아온다는 사실에 대해 깊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크립토가 가져올 변화는 무엇인가? 2년 전이었다면 아마 지구 상 모든 은행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어도 과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겸손해지는 시기인 만큼 작게 시작해보자. 크립토의 효용에 있어서 하한선은 역시나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혁신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같은 어려운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국제 송금이나 해외 직구 또는 국내에서 지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결제하고자 시도해 본 경험이 있다면 알 수 있다 (최근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조차 힘든 제품이나 서비스가 있다. 에어컨, 스마트폰이나 로켓 배송과 같은 것들. 지금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불편함들이 사실은 그리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Flashbot의 Phil Daian이 말한 것처럼, 블록체인은 전통 금융 시스템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크립토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로서, 그 잠재력이 결제 시스템의 개선에 그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블록체인이 가진 더 큰 가능성은 모든 Internet-native 자산들의 백엔드 시스템으로 자리 잡는 것, 나아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새로운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탄생한 이래로 더욱 많은 시간과 돈을 온라인에서 소비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온라인 상에서 탄생하고 사라진다. 게임 아이템, SNS의 게시글, 음악, 미술 그리고 자신의 아이덴티티까지. 수 많은 것들이 온라인 상에서 창작되고 소유하고 교환될 것이고, 이를 활용한 새로운 어플리케이션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Why Blockchain은 멍청한 질문처럼 느껴질 것이다. IT 제품이 모바일 환경과 클라우드를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블록체인은 온라인 상에서 가치를 교환하고 참여자 간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기본 설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나의 관점에는 크립토의 가치에 대해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크립토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비트코인이 탄생한 지 15년, 이더리움이 탄생한 지 9년이 지났다. 코로나 시기 투자금이 몰렸던 시기에 유의미한 가치를 성취하지 못 했기 때문에 ‘크립토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자주 접한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한정되지 않고 사람들의 기대는 언제나 기술의 발전과 사업의 유기적인 성장을 선행하며, 이는 주기적인 형태로 반복된다. 블록체인 산업의 발전과 창의적인 어플리케이션이 등장으로 많은 사용자가 유입되는 과정이 분명 선형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블록체인이 진짜 Mass Adoption을 달성했을 때의 시장 규모 그래프는 컨설팅이나 VC 리포트에 나오는 것처럼 60% CAGR로 멋지게 우상향하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기술 관련 산업은 특정 임계점을 넘었을 때만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 최근에는 물론 OpenAI의 chatGPT가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반면 오랜 기간 임계점을 넘지 못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로보틱스는 오랜 시간 유망 분야로 주목 받아왔지만, 아직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Boston Dynamics의 로봇들마저 충분한 PMF를 찾지는 못 했다. 크립토는 이제 막 태동의 시기를 벗어난 시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투기꾼들과 체리 피커들이 빠져나가고 조금 더 안정적인 발전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크립토 산업이 겪은 몇 차례의 사이클은 사람들의 기대 심리와 내러티브에 의한 성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다음 크립토의 사이클은 비트코인의 반감기나 FED의 금리 완하가 아닌, 일반 소비자들에게 실질적인 효용과 참신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촉발될 수 있다고 믿는다.
Conclusion #
To me, it underscores our responsibility to deal more kindly with one another, and to preserve and cherish the pale blue dot, the only home we’ve ever known.
– Pale Blue Dot, Carl Sagan
2023년은 분명 크립토 산업과 그 종사자들에게 즐거운 해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대내외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단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한국은 멸종 위기에 처했으며, 세계 경제는 드리우는 전운 아래에서 역사적 변곡점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 와중에 AI는 지구 상에 남은 돈을 모두 끌어당길 것으로 보이며, 크립토는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큰 변화의 흐름 앞에 자유롭지 않다. 산업과 직위를 불문하고 주변의 많은 이들이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성 앞에서 힘겨워하고, 각자의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느낀다. 상황이 어렵지만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이 역경을 헤쳐 나가자는 따분한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미쳐있다.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젠가 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봄이 꼭 블록체인이나 Web3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 언제가 아니라 봄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최근 복잡해진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 스스로에 대한 다짐을 위해 이번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바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기를, 그로 인해 스스로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